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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혁주
  • 인터뷰
  • 입력 2020.11.12 22:25
  • 수정 2022.09.05 16:07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 전통의 재해석 1

덕화명란이 새롭게 만드는 로컬 콘텐츠

11월 비로컬 특집은 <전통의 재해석>입니다. 로컬의 전통자원을 발굴해 크리에이티브를 담아 창조하는 로컬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입니다.

‘덕화명란’으로 유명한 <덕화푸드>의 장종수 대표를 만나고 왔습니다. 명란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기업부설연구소를 만들어 명란의 역사를 연구하고 ‘덕화’만의 맛을 내고 있는데요. 한국식 명란을 개발해서 명란의 원조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덕화푸드>를 통해 전통이 어떻게 재해석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부: 전통을 복원하다
2부: 명란 원조는 한국, “K푸드도 가능하다”

최근 ‘명란 아보카도 비빔밥’이나 ‘명란 파스타’가 인기를 끌며 명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명란의 원조는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에서 명란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란의 원조는 한반도입니다. 일본이 명란을 식품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로 보여집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의 명태산업에 진출하며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명란은 일본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합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에 따르면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주의 국가로 흘러들어가 큰 영향을 끼친 흥미로운 사례가 됩니다.

1897년 조선으로 와 1907년 이후 함경남도 원산에서 명태 어업을 하던 ‘히구치 이즈하’는 명란의 상품성을 알아보고 강원도 양양에 ‘히구치상점’을 열게 됩니다. 다음해인 1908년에는 부산 부평동으로 상점을 옮겼고 일본, 대만, 만주 등으로 수출하게 됩니다. 명란이 국제적인 상품화 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명란 기업 <후쿠야>를 세운 ‘가와하라 토시오’는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뒤 일본으로 갔는데요. 부산에서 먹었던 명란의 맛을 잊지 못하다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일본식 명란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멘타이코(明太子)’의 시작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덕화푸드>는 명란젓 생산에서 한일을 합쳐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입니다. 창업주 장석준 회장은 명란분야에서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된 분이기도 합니다.

가업을 이어받은 장종수 대표는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더 깊게 명란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맛과 공정의 개선에만 그치지 않고, 명란인문학 연구를 통해 원조 명란을 복원해 <조선명란>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명란은 전통 음식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때마다 그 시대에 맞게 변화해 적응했습니다. 장종수 대표가 “전통이 살아있으려면 시대에 적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덕화푸드> 창업자 장석준 회장 (사진=덕화명란 공식홈페이지)

▶경제를 전공하고 금융 관련 일을 하고 계셨다고 들었다. 다른 길을 가다가 명란에 관심을 가지고 <덕화푸드>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 2006년도에 회장님이 설비투자를 하면서 회사를 확장했는데 이 때 같이 하자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공기업에서 공공자금 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전공인 경제를 더 공부할까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사실 회장님이 인자하시면서도 말씀이 없는 편이신데 같이 하자는 말을 하시니 회사가 약간 심각한 상황인줄 알고 내려왔다. 당시에 회장님이 내주신 숙제는 “국내시장을 개발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후쿠사야>라는 업체의 공장에서 3개월간 일을 배웠고 이후 3개월은 <카네하>라는 회사에서 관리 업무를 배운 뒤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조와 식품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마인드와 선진적인 시스템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덕화푸드>를 이어가고 있는 장종수 대표(사진=덕화명란 공식홈페이지)

▶연수 후에 회사로 복귀했을 때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다. 굉장히 많은 기업들이 힘들어했다. <덕화푸드>는 당시 매출이 100% 일본 수출로 이뤄졌다고 들었는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다.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 결론부터 말하자면 묵묵하게 버텼고 운 때가 잘 맞았다. 회사로 복귀했을 당시 8년 가까이 거래해오던 회사의 거래가 끊길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때 <세븐일레븐> 그룹에서 해외 거래처를 찾고 있었다. 명란을 해외에서 가공한다고 했을 때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한 회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기존 거래처와 거래가 종료되면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물량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한성>, <오양> 다음으로 국내에서 수산쪽에서는 세 번째로 HACCP도 받았는데, 품질 측면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세븐일레븐>과 독점으로 PB계약을 맺었다.

사실 회장님께서 정말 회사 폐업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실 정도로 2007~2008년은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도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버텨보자 참고 견딘 것이 <세븐일레븐> 수주로 숨통이 트였다. 오히려 물량이 이전의 2배로 늘어서 직원도 더 늘어나고 매출액도 200억 원대 중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6년에 회장님이 회사 설비를 늘렸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걱정을 했는데, 무리해서라도 공장을 늘렸던 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명태 손질과 명란젓 제법이 나와있는 문헌 <한국수산지> (사진=덕화명란 공식홈페이지)

▶회사에 명란연구소가 있다고 들었다. 연구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 전 세계에서 명란은 일본시장이 90%를 차지한다. 그래서 일본에 명란을 잘 만드는 회사가 많은데, 그 회사들과 견주었을 때 우리가 맛에서 월등히 앞설 수 있는 명란을 만들고 싶었다. 회사가 힘든 시기가 올 때마다 R&D를 꼭 해야 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R&D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다.

또 국내 시장을 개발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나서 명란 단일품목만 취급하기로 기업의 방향성을 잡았다. 사실 여러 유혹이 있기도 했지만, 2011년에 회장님이 최초로 수산제조분야에서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되면서 명란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기업부속 연구소는 2009년에 만들었는데 명란 하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맛을 개선하는 방법들을 꾸준히 연구했다. 명란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조리학과 출신을 뽑았다. 사실 식품회사에서 조리학과를 잘 안 뽑는데 요리를 전공한 사람이 있어야 명란에 맛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명란의 맛이 자꾸 변질되는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절임이 빠져서 그렇다. 그래서 연구소에서 절임액이 빠지지 않도록 구성한다거나, 맛있는 조미액 배합을 연구한다거나 하는 일을 했다. 예를 들면 ‘첨가물 저감화 프로젝트’라고 해서 합성보존료, 타르색소, 발색제 등을 넣지 않고 자체 개발한 천연 추출물을 넣었다. 또 제법 연구를 해서 기존 재래식 명란의 1/3 수준인 염도 3.5~4.5%의 명란을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제품 구성이 나왔다. 시그니처 제품인 <그때 그대로 명란>, 고춧가루 양념을 하지 않고 소금만으로 간을 한 <덕화 백명란>, 매운맛인 <숙성고에서 갓 꺼내먹는 명란>이 있고 이후에는 <조선명란>도 개발했다. 또 <명란 마요>와 <명란 튜브>도 출시해서 식재료로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또 한 번 회사가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아베노믹스 등의 영향으로 환율 문제가 있었고 2015년에는 <세븐일레븐> 거래도 중단됐다. 그 때 우리도 공장을 축소하고 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는데, 2017년으로 넘어가면서 어떤 흐름이 생겼다. 명란과 아보카도가 식재료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명란 업계 전체가 커졌다.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R&D를 통해서 10년간 명란을 연구 했던 것이 커지는 시장과 맞물리면서 국내 시장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빠르면서도 신선하게 명란을 선별하고 포장하기 위해 오랜 시간 연구해서 직접 개발한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했다. (사진=덕화명란 공식홈페이지)

▶덕화푸드가 오래도록 버틸 수 있었던 힘이 연구소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 시스템, 근로자, 연구소 삼박자가 잘 맞았다고 본다. 회장님은 제조파트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나도 일본에서 일을 배울 때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했다. 맛을 아무리 잘 연구했어도 생산에서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시스템이 엉망이면 안 된다. 그래서 시스템 구축에도 신경을 많이 썼고 최초로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일본을 보면 제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생산파트라는 포지션이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하지 않나. 성향 자체가 그걸 즐기고 오타쿠처럼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파트는 사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포지션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경우에 이 생산파트가 큰 장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제조라인에는 우리와 10년이 넘도록 함께 일한 50대 여사님들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명란만을 만져왔기 때문에 원료를 잘 다룬다.

결국 안정적인 제조 시스템과 숙련된 근로자들 그리고 연구소를 통한 R&D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굴러왔다. 우리나라에서 명란만 단일제품으로 생산하는 회사는 거의 없다고 보는데, 이런 맥락에서는 명란을 단일품목으로 내세웠던 정책이 정말 잘 맞아 떨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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