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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이야기] 방배史로 보는 사당 로컬

(팟캐스트) [사당이야기 ep02] 방배史로 보는 사당 로컬

방배동도 사당동이었다?
이번 시간은 방배동의 역사를 통해 사당 로컬 아닌 사당으로 여겨졌던 사당역 동편 방배동에 대해 알아봅니다.

○비로컬 이연지 기자: 지난 시간에 저희가 ‘사당 이야기’에서 다루려는 ‘사당 로컬’이 행정구역이 아닌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방배동’을 아우르는 지역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하철 노선으로 설명하면 이수역에서 사당역으로 이어지는 구역에서 나누어져 있죠. 오늘은 저희가 왜 이 구역들을 ‘사당 로컬’이라고 주장하는지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이 동네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역사가 상고시대에서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단, 방배동 뒷산인 우면산에서 지석묘 고인돌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이것만 따져도 역사가 5,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거든요. ‘지석묘’란 권력자가 죽어서 묻힌 곳에 세워지는데 조선시대의 능과 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살았던 동네’ 수준이 아닌 거죠.

‘지석묘’라는 상징적인 유물만으로도 선사시대에도 어느 정도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증명됩니다. 즉, “지금의 서초동 우면산 일대의 광범위한 범위가 하나의 통치 영역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야깃거리들이 굉장히 많은데, 아쉽게도 그 이야기들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가 지금 수도 서울을 이야기할 때, “2,000년 전에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쌓았다”라는 이야기만으로도 ‘2,000년 된 도읍지’라고 얘기하잖아요? 당시 시대의 유적도 발견돼서 ‘위례성’, 지금으로 치면 송파구에서 하남시까지의 영역이 백제의 수도면, 이곳 서초구와 동작구 일대는 수도와 관련한 근교농업을 하던 지역이었다고 본다고 합니다.

위례성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실제로 우면산 어딘가에 백제시대의 절터가 있다고 해요. ‘방배동’이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기원은 세종대왕의 첫째 형인 ‘양녕대군’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세종대왕은 적자가 아닌 셋째고, 첫째 형은 한량, 둘째 형은 일찌감치 불가에 귀의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역사 기록을 보면 첫째 형은 아들의 첩을 취해서 아들이 자살할 정도였으니 정말 패륜아고 불량아였죠. 그 정도 객기니 왕도 하기 싫다고 도망을 다녔는데, 당시 궁이 있던 곳을 등지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여기까지 넘어왔다고 해서 “한양을 등졌다”라는 의미의 ‘방배동’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강을 보고 등졌다”라는 유래도 있어서 어느 쪽을 등졌다는 건지는 애매해요.

또, 방배동을 말할 때는 우면산도 지나칠 수 없어요. ‘우면산’은 ‘소 우(牛)’에 ‘잠잘 면(眠)’ 자를 써서, “소가 잠자는 형상을 한 산”이라는 뜻입니다. 해발 260m 정도니 등산이 아무리 싫은 사람도 올라갈 만한 만만한 높이인데, 풍수지리적으로 산의 형상이 “소가 우면산 쪽에 머리를 두고, 지금의 내방동 쪽에 배를 두고 한강을 등지고 앉은 형상”이라고 해서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우면산의 동편과 서편으로 씬이 갈리는 느낌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우면산 동편, 지금의 양재 사거리 쪽을 ‘말죽거리’라고 불렀습니다. ‘말죽거리’의 어원이 “말에게 죽을 쑤어서 먹였다”인 걸로 보아,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지점이던 옛날의 역참과 연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양에서 지방으로 나가거나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올 때 한 번 쉬어 가는 곳이었을지 모르는 거죠.

우면산 서편은 옛날에는 ‘여우고개’, 지금은 ‘남태령’으로 불립니다. ‘태령’이 “험하고 높은 고개”란 뜻인데,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바뀐 이유가 재미있어요.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나서 이곳을 행차했는데, 관리에게 “언덕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즉석에서 “남쪽에 있는 큰 언덕(남태령)입니다”라고 답한 거죠. 정조가 나중에 사실을 알고, “‘여우고개’인데 왜 거짓말했느냐?”라고 물었더니, “임금님께서 가시는 길을 ‘여우고개’라고 부를 수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라고 해서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남태령 (사진 출처= 나무위키)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실제로 여우가 잘 출몰하던 고개였는데, 호랑이도 많이 등장했다고 해요. 즉, 우면산 동편은 ‘말죽거리’, 서편은 ‘여우고개’로 나뉘어 있었고, 이 두 곳이 서울에서 경기도나 지방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던 거죠.

조선시대부터 말죽거리를 거쳐서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 지방인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이 있었고, 지금도 말죽거리를 지나는 경부고속도로가 삼남지방을 연결하니,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고속도로와 똑같은 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남태령은 지금의 과천, 안양, 수원, 더 나아가서는 시흥시까지 연결된 지점인데, 현재 남태령의 동편은 방배2동이고, 서편은 관악구 남현동입니다. 보통 길이 발달하면 그 길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형성되는데, 조선시대 때 지금 우리가 ‘동작대로’라고 이야기하는 이수교차로도 남태령처럼 서편과 동편으로 행정구역이 갈렸어요.

정리하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사당 로컬’이 조선시대에는 동작대로를 기준으로, 서편은 과천군 상북면과 동면이었고, 동편은 광주군 언주면이었어서, 우면산을 기준으로 좌측 길인 과천과 우측 길인 광주로 나눠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가 얘기하려는 ‘사당 로컬’은 옛날부터 큰 길이 지나가고 있었을 뿐, 서로 행정이 다른 동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행정구역이 계속 바뀌어서 1914년에 과천군이 시흥군으로 편입되면서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로 명명, ‘방배’라는 이름이 등장해요.

당시 ‘시흥구 신동면’은 지금의 서초구로 서초1~4동, 잠원동, 반포1~4동과 반포본동, 방배1~4동과 방배본동, 양재1동, 우면동까지를 포함합니다.

조선시대에서 일제시대로 넘어오면서 ‘광주군 언주면’에는 양재2동, 내곡동, 경부고속도로 동편인 말죽거리 지역이 편입되고, ‘시흥군 신동면’에 해당하는 경부고속도로 서편에 지금의 방배, 서초, 사당동이 모이면서 현재 저희가 말하는 ‘사당 로컬’이 하나의 행정구역 안에 편입된 것입니다. 전에는 군 단위로 분리되어 있다가 이때부터 하나의 군 안에서 신동면 방배리와 사당리로 나뉩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겪은 후인 1963년에 또 한 번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요. 이때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신동면은 영등포구에, 광주 지역은 성동구에 편입됩니다. 당시 영등포구, 서쪽으로는 지금의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까지가 다 포함됐는데, 즉 한수이남을 영등포구와 성동구로 나눈 것이죠. 성동구에는 한수이북까지 포함되어서 성동구, 광진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다섯 개 구였습니다.

지금의 성동구는 작아진 거죠. 즉 서초, 방배, 사당이 영등포구 편입으로 하나의 로컬로 형성된 듯한 시기가 이때입니다.

1970년에는 이 지역에서 법정동과 행정동을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이 벌어지는데, ‘법정동’은 호적처럼 고유한 주소를 말하죠. 이때는 모든 법정동에 쉽게 말해 주민센터 동사무소가 들어설 수가 없어서 몇 개의 동을 아우르다 보니, 동사무소 이름과 실제 주민이 사는 동네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서 이에 맞춰 행정동을 변화시킵니다.

원래는 이 지역을 아우르던 동사무소 이름이 ‘남성동 동사무소’였는데, ‘사당 동사무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당동도 사당1, 2동으로 분리해요. 지금의 방배동은 당시 사당1동이었습니다.

◎비로컬 이상현 기자: 그럼, 지금의 방배동이 그때까지 사당동이었고, 지금의 사당동이 남성동이랑 합쳐지면서 1, 2동으로 나뉜 거군요.

(구글맵 캡쳐)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네. 이렇게 따지면, 60년대의 방배동까지 포괄하는 게 사당이었던 거죠. “1914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이수교차로에서 남태령역까지 연결하는 축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를 사당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지금도 지역적으로 동작구 내에서는 사당동이, 서초구 내에서는 방배동이 조금 소외되는 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행정동이 자꾸 바뀌다 보니 “우리 동네가 아닌 것 같다”라는 정서가 형성된 것 같아요. 방배동의 경우 ‘강남 3구’라 불리는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 중에서 가장 변방에 위치하고, 서민층이 많은 동작구에 인접했고, 옛날에 사당동으로 불렸던 것과도 관련된 정서가 좀 남아있는 것 아닐까요?

또, 사당동이 동작구에서 소외된다는 의미는 교통에서 알아볼 수 있어요. 동작구가 지하철 4호선, 7호선, 9호선과 연결되어 있고, 2호선과도 연결되는 감이 있어서 교통이 편리해요. 제가 예전의 말죽거리인 경부고속도로 서편이 영등포구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영등포의 중심지가 바로 노량진입니다.

‘노량진’의 ‘진(津)’이 큰 폭우, 항구를 의미하는 한자라 옛날부터 한수이남 교통의 정점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영등포 지역은 버스 노선도 그렇고 다 노량진으로 길이 통하는데, 유독 사당과는 연결된 버스 노선이 딱 한 개예요.

◎비로컬 이상현 기자: 지도를 보면 이유가 느껴지는데, 현충원에서 바로 아래인 서달산 관악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이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끊어지는 느낌입니다. 이 사이에 사당대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사실상 두 지점을 이을 계기가 없었다고 보는 거죠. 그런 점에서 “노량진보다 가기 편한 지금의 이수 쪽으로 계속 오다 보니 가운데에서 섞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좀 듭니다.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여기서 다가 아니라 1973년도에 관악구가 신설되면서 영등포구에서 또 관악구가 분리되면서 행정구역 지형이 전부 바뀝니다. 당시의 방배동까지는 관악구로 편입시키고, 방배동 동편은 성동구에 남겨놓는 형태로요. 그때까지만 해도 강남구가 없었습니다.

이때 정말 하나의 지역이 됐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1975년에 성동구가 너무 넓으니까 또 성동구에서 강남구를 분리해요. 한수이북만 성동구로 남겨 놓고, 한수이남을 강남으로 분리했죠. 그러면서 관악구 사당동에서 방배동을 정확하게 분리하고, 방배동을 강남구에 편입시킵니다. 이때 사당대로를 기준으로 오른쪽을 강남구로 편입시키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사당역, 이수역 동편에 강남 3구가 만들어집니다.

즉, 1914~1975년도까지는 우리가 지금 ‘사당 로컬’이라고 가정하는 지역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는 거죠. 현재 행정구역 서초구는 또 1988년에 서초구와 강남구가 분리되면서 생깁니다. 서초구 방배동의 학원 정체성도 그때부터 생기죠.

▷ 참고기사 : [도시탐구] 압구정동에서 소 몰며 밭 갈던 그 시절의 강남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92465

◎비로컬 이상현 기자: 관악구 남현동이 형성된 얘기도 잠깐 더하면, 1980년도에 동작구가 신설되면서 동작동과 사당동이 합쳐집니다. 현재 반포본동이 원래 동작동이었는데, 이 동작동이 사당동으로 들어가면서 일부분을 반포동으로 떼어줘요. 그래서 강남구로 들어가고, 동시에 남부순환로 아래는 관악구로 남아서 남현동이 됩니다. 현재 동작구와 관악구는 사당역 남부순환로 기준으로 나뉘어요.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네, 여기까지 제가 ‘동작구 사당동’, ‘서초구 방배동’ 이야기를, 엘님이 ‘관악구 남현동’ 이야기를 정리해줬습니다.

그런데 행정구역의 변화를 살펴보니, 서초구 이름의 유래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어요. ‘서초’가 우리말 ‘서리풀’에서 만들어진 이름인데, 1987년에 서초구 분리를 앞두고 주민들 사이에서 “이 지역을 반포라고 불러야 한다”라는 여론이 있었나 봐요. ‘반포’를 한자로 풀면 “소반이나 쟁반처럼 생긴 물가”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서리’가 “둥그렇게 포개어 감는다, 빙 둘러 감는다”라는 의미라 그랬다고 합니다.

즉, “강들이 이곳을 빙 둘렀다”라는 의미인데, 앞서 얘기한 우면산 자락에서부터 샘으로 연결된 물줄기가 계속 있어왔다고 해요. 옛날에는 밑에 하천도 흘렀는데, 복개도로를 만들어 지금은 안 보이죠. 그 형태로 여러 하천들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어서, ‘반포’라는 이름이 형성된 거거든요.

동시에 여기 옛날에 풀에 서리가 내린 ‘서리풀’이 무성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서리 상’에 ‘풀 초’를 써서 ‘상초리’로 불렸던 거죠. 아무래도 강물과 산 사이의 온도 차로 당시에 서리가 맺히는 기상 현상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서래마을 (사진 출처= 나무위키)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서리풀’에서 온 유래 말고도 “우면산 여러 골짜기에 물이 이리저리 서리어 흘러서 서래마을이 생겼다”라는 유래도 있습니다.

이 서래마을의 물이 동작동에서 온 물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들어가서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다” 해서 ‘서릿벌’, 이게 ‘서리퍼리’에서 ‘서리풀’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름의 유래상 ‘서초’와 ‘반포’의 기원이 같을 수도 있다는 거죠. 여기서 석연치 않다는 건 방배의 의미가 서초구에 담겨있지 않아서예요. 서초구 안에서 방배가 소외된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싶은 거죠….

또, 관악구의 성장 배경을 말할 때는 이촌향도현상이 항상 따라 나옵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지역의 행정구가 계속 변천했잖아요? 동작구가 등장한 1980년까지를 보면, 경기도였다가 서울에 편입됐고, 영등포였다가 관악구, 동작구, 다음엔 강남구로 분리되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는데, 이 지역이 농촌에 있던 분들이 많이 올라왔던 지역이에요.

특히 관악구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향우회의 지지가 절대적일 정도로 호남에서 상경한 분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관악구에서 한때 어르신들 자서전 만드는 사업을 했는데, 오래 사셨던 분 중에는 관악구가 생기기 이전부터 살았던 분도 계세요. 관악구의 형성과 변화 과정이 나이테처럼 자서전 안에 기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 호남 사람들이 이촌향도현상으로 넘어왔다 이주해가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더 변방인 과천으로 밀려나던 현상도 포착했다는 얘기를 사업 관계자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모셔서 말씀을 들어보면 ‘사당 로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사당’을 말할 때는 ‘동작구 사당동’ 중에서도 사당 1, 2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오늘로써 ‘사당 로컬’ 안에서 방배동 이야기도 함께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강남이 형성된 배경도 ‘사당 로컬’과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 참고기사 : 2030서울플랜(2030서울도시기본계획)
https://news.seoul.go.kr/citybuild/archives/34089

◎비로컬 이상현 기자: 작년 9월에 서울시가 <2030 서울플랜>을 발표했는데 크게 강남 쪽 한강이남을 서남 생활권, 동남 생활권으로 구분하고, 그 안을 도심, 부도심, 지역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눴어요.

그 플랜을 보면 사당, 이수가 지역 중심에 속해있어요. 방배동은 강남 생활권에 들어가지만 지역 생활권에서는 사당, 이수 생활권에 포함됩니다. 그런 점에서도 저희가 풀어가는 ‘사당 이야기’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로컬 윤준식 편집장: 여담이지만, 같은 ‘사당 로컬’인데 동작대로 동편인 방배동은 8학군에 속해서, 과거 서편인 영등포구 시절 지금의 관악구 지역 분들 중에 교육열이 있으신 분들은 주소를 방배동으로 옮겨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방배동 부동산 가격이 건너편 사당동보다 비싼 이유죠. 동작대로를 끼고, “사당동과 방배동 사이에 모종의 지역감정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는 이유입니다.

○비로컬 이연지 기자: 저희가 요즘 사당을 직접 발로 탐방하면서 항상 하는 말이 “각 역의 출구부터 보이는 모습과 특징이 정말 다양하다”였는데,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역사적 배경도 다양성에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당 이야기’를 전해드릴 텐데, 오늘은 그 시작으로 지금의 구가 형성된 이유와 저희가 제시한 ‘사당 로컬’의 배경을 설명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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